[2099년 9월 3일자 국제신문 인문학 칼럼 원문, 신문 편집판은 몇 문장이 빠져 있음]
한국 대학생들은 왜 체 게바라에게 관심을 가질까
청년은 우리의 미래, 그들의 사회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해
장혜영
시대를 막론하고 ‘요즘 아이들’ 에 대한 근심은 늘 존재해 왔다. 비틀즈에 열광했던 세대가 서태지에 열광하는 ‘요즘 아이들’을 보며 혀를 차고, 서태지의 패션을 따라 했던 세대가 연예인을 따라하는 자녀들을 바라보며 ‘요즘 아이들은 이해를 못 하겠어’를 연발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반복되는 풍경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젊은 세대에 대한 걱정은 약간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요즘 젊은 청년들은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고 신문이나 뉴스를 보지도 않으며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가 사실이라면 우리 사회의 근간이 흔들리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정말 요즘 청년들은 그렇기만 한 것일까?
개인적으로 작년 한해 한국에서 대학생들에게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 대해 가장 관심이 가는 것에 대한 리포트를 써보라고 했더니 60% 이상의 학생들이 체 게바라에 대해 쓴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아르헨티나 사람을 가리켜 부를 때 간단하게 쓰는 ‘체’(Che: 그냥 호응 감탄사로도 쓴다)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진 에르네스토 게바라(1928-67)는 아르헨티나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딱히 모자랄 것 없이 풍족한 환경 속에 성장했지만 어려서부터 천식을 심하게 앓아 자기처럼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의대를 갔다고 한다.
하지만 의대 재학 시절 남아메리카 탐험 여행을 떠났다가 인간 이하의 삶을 살면서도 사회적으로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하는 수많은 원주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의술로서는 그들의 절망적인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세상을 바꾸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며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돌아다니다가 멕시코에서 쿠바 망명객인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게 된다.
그들과 의기투합해 쿠바의 바티스타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워 결국 이겼지만, 냉전 시대의 살벌한 국제 정치 상황 속에서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에의 순진한 꿈만으로는 한 국가를 꾸려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쿠바의 현실 정치는 쿠바 사람들에게 맡기고 볼리비아로 떠나 거기서 농민 게릴라 운동을 주도하다가 서른아홉 나이에 정부군에게 사살된다.
그런 그가 죽은 뒤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비롯된 자신의 남다른 삶을 절절하게 기록한 일기가 발견되면서 유럽에서부터 체 게바라 붐이 일기 시작했다. 한 발짝 떨어진 유럽에서는 그를 아이돌스타처럼 요란스럽게 포장했지만 체의 인생이 바로 현실의 문제에 맞닿아 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그의 삶은 지금껏 청년들에게 실존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이런 체 게바라에 대해서, 사회 문제에 더 이상 관심이 없고 이웃은 생각도 않는다는 이기적인(?) 한국의 대학생들이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는 게 번지수가 맞는 일인지, 그래서 혹시 인터넷에 자료 찾기가 쉬워서 다들 체에 관해 베껴온 건 아닐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 보았지만 수업 시간에 체에 대한 내용이 나올 때면 그들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을 보니 그들이 리포트의 끝에 덧붙인 소감들이 엉터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웃의 아픔을 그냥 쳐다보고만 있지 않고 실천에 옮겼던 자에 대한 존경심,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꿈과 동경,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불만과 부끄러움을 솔직히 써냈던 그들은 역시 아직은 세상의 때에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20대의 체가 그랬듯이 이상과 꿈을 가슴 한편에 간직하고 있는 파릇한 청년(靑年).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있어 가장 큰 특징은 학생 운동이 중심적 역할을 한 점이라 한다. 정의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열정과 불의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하는 순수한 마음이 현재의 한국이 있도록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언론에 등을 돌리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떠나보낸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그들만의 책임일까? 그들이 외면한다는 언론 매체에는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일까? 그들의 정치사회적 무관심을 오히려 바라는 이들도 있었던 것은 아닌지?
누가 뭐래도 청년들은 우리 사회를 정화시키는 마지막 필터였다. 그들을 통해 우리나라는 이만큼 변화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을 우리 사회를 지킬 건전한 시민으로 키우느냐 아니면 사회와 이웃에 등 돌린 은둔자로 만드느냐 하는 것은 현 기성세대의 남은 숙제이자 가장 핵심적인 백년지대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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