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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007년 과테말라, 소치와 평창의 추억

alyosa 2010. 3. 20. 03:17

[부산 국제신문 인문학 칼럼 2010년 3월 18일자] 소치가 평창보다 우세했던 이유 /장혜영

목적을 다 드러내는 정치적 외교보다 문화적 외교가 더 호소력 있는 법

 

라틴아메리카는 동계스포츠와는 거리가 먼 편이지만 춤과 음악을 즐기는 곳답게 피겨스케이팅은 좋아해 아르헨티나에는 아마추어들의 피겨 경연 TV 프로그램이 있을 정도다. 덕분에 지난 밴쿠버 동계올림픽 때도 피겨 경기는 TV 중계로 충분히 즐길 수 있었는데 그 중 스타라면 물론 새 시대의 여제로 등극한 우리의 김연아와, 또 '돌아온 황제'로 불리며 최근에 현역으로 복귀한 러시아의 예브게니 플루센코를 꼽을 수 있겠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피겨 남자부 우승자인 플루셴코는 구소련 붕괴 직전 피겨에 입문해 나라가 가장 어렵던 시절 선수생활을 하면서도 고국을 떠나지 않아 자국민들에게 독보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데, 그런 그가 폐회식장에서 다음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소치의 단복을 입고 손을 흔드는 것을 보니 갑자기 2007년 여름 과테말라에서 있었던 한-러 전쟁의 추억이 떠올랐다.

 

우리나라의 평창과 러시아의 소치가 동계 올림픽 유치 경쟁을 벌일 때 그 최종 결정이 내려졌던 2007년 IOC 총회 장소가 중앙아메리카의 과테말라였다. 당시 과테말라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지지표가 중요한 상황이었기에 한국과 러시아 양국 모두 치열한 홍보전을 벌였는데, 그때 일찌감치 과테말라시티에 도착해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스케이트 및 아이스하키 시연과 강습을 벌이고 과테말라 아이들과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질주를 하거나 친선 축구 시합까지 뛰며 언론의 관심을 러시아 쪽으로 잡아끈 이가 바로 플루센코였다.

 

그를 비롯한 러시아 스포츠 스타들의 과테말라 총 공세에 당시 한국 대표단에서는 '우리도 동계올림픽 출신 대스타가 필요하다'며 한탄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올해 밴쿠버에서 다양한 종목에서 유례없이 좋은 성적을 내자 이제 우리도 동계스포츠 스타를 많이 갖게 되었으니 그들을 앞세워 동계올림픽 유치에 다시 한번 도전해야 한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과연 러시아가 동계스포츠 스타가 많아서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3세계 국가들의 표를 잡아낸 것일까?

 

사실 나는 그 당시 우리나라의 평창이 동계올림픽 후보지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대신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는 이미 소치로 결정된 줄로만 알았다.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방송되는 인기 스포츠 채널에서 몇 달 동안 계속 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이말 저말 없이 단지 '러시아 소치, 2014년 동계올림픽' 이란 문구만 나오는 광고를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운 설원을 보면서 나는 소설 '닥터 지바고'를 떠올렸고, '저 나라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구나, 잘 어울리네' 하고 생각했을 뿐 우리나라의 평창 또한 후보지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광고나 뉴스도 접한 적이 없었다.

 

 물론 러시아는 아직도 강대국 대접을 받고 있고 구소련 시절부터 정치-경제적 이유로 라틴아메리카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하지만 러시아의 외교 방법은 항상 문화적인 것 우선이었다. 제정 러시아 말기 전설적 발레리나인 안나 파블로바가 멕시코 사막에서 농민들 앞에서 춤을 추었던 것은 유명한 일화이며 구소련 시절에는 멕시코-소련 합작 영화를 만들며 우호를 다졌을 뿐 아니라 많은 인재들을 라틴아메리카로 유학 보내 현재까지도 적지않은 러시아인들이 멕시코 등 여러 나라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러시아의 국가 이미지는 여기 라틴아메리카에서도 항상 '예술과 문화의 나라' 이다.

 

비단 동계올림픽 유치 문제뿐 아니라 우리는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는 나라들에 대해서만, 또 사안이 목전에 다다랐을 때 당장의 목적을 다 드러내 놓으며 외교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다. 이해타산에 따라 맞물리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비정한 국제 관계에서 한 나라가 구축해 놓은 문화적 이미지는 그 어떤 외교력보다 큰 힘이 될 수 있는 법. 우리도 이제 눈앞의 사안에만 연연할 것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인지시키기 위한 백년대계를 세우고 그 인재 양성에 힘쓸 때도 되지 않았을까? 우리의 동계 스포츠 스타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직 어린 그들에게 지금 당장 유치전의 홍보 대사 역할을 해내라고 등을 떠미는 것보다는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사절로 키워낼 장기적 계획을 잡는 것이 더욱 효율적인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