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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축구 관람기 2 : 세비야 대 베티스, 2002 년 가을

alyosa 2007. 8. 19. 11:49

2002 년 가을 라틴 시네마 세상 http://latincine.netian.com 에 먼저 올렸던 글임..

 

 

스페인 축구 탐방기[2] 호아킨의 베티스 VS 세비야 FC 의 경기 ...

 

( 이전 글에 이어서... 이 글 속의 게임은 2002 년 9 월 마지막 주말 혹은 10 월 첫주 경기 였던 걸로 기억... )

 

그렇게 마드리드에서 비교적 편안하고 얌전하게 (?)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관람한 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중심도시인 세비야 에서 프리메라 리가 경기를 보러 갔을 때 나는 갑자기 여기가 스페인이 아니라 남미의 축구 경기장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이날의 경기는 똑같이 세비야를 연고지로 하고 있는 세비야 FC 팀과 세비야 베티스 팀이 맞붙는 이른바 더비 경기였는데, 베티스 팀은 우리 나라와의 8 강전에서 승부차기를 실축하였던 스페인 국가대표 선수 호아킨과 브라질의 명드리블러 데니우손이 버티고 있는 강팀이었다.

 

 

월드컵에서의 아픔을 딛고 라울의 뒤를 이을 스페인 축구계의 황태자로 떠오르고 있는 호아킨 산체스 로드리게스 ( Joaquin Sanchez Rodriguez / 베티스 소속)

 

이곳 안달루시아 카디스 출신으로 투우사 엔리케 폰세와 축구선수 루이스 피구를 숭상하며 자랐다는 스물한살 청년 호아킨은 ' 승부차기를 실축하던 그 악몽의 순간을 수천, 수만번 다시 떠올렸다 '고 말할 정도로 월드컵 때 많은 충격을 받았지만 곧 그것을 극복하고 최근 머리까지 짧게 깎은 채 굳은 다짐으로 종횡무진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그 호아킨도 볼 겸 해서 세비야 FC 팀의 홈 경기장인 라몬 산체스 피추안 경기장을 찾았는데, 경기장 바깥에서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FC 세비야 팀의 상징인 빨간 스카프를 목에 두른 무수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온다 싶더니, 말을 탄 기마 경찰들이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뭣 때문인지 몰라도 경찰들은 괜히 공포탄을 쏘아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고, 젊은 청년들은 그 때문에 흥분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드디어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안에서는 또 관중석을 가득 매운 FC 세비야 응원단들이 모두 일어선 채 춤을 추고 폭죽을 터뜨리고 월드컵 때 우리나라 대형 태극기 만한 대형 현수막을 들어올렸다 내렸다 하며 광적인 응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열광적인 세비야 FC 응원단들 ( 촬영: 장혜영 )

 

나는 사실 매표소 직원의 농간에 넘어가, 엉겁결에 아주 비싼 표를 사는 바람에 돈이 아까워서 속이 쓰려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싼 3 등석 자리에 갔더라면 저 날고 뛰는 많은 사람들 에게 밟혀 살아 나오기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세비야를 연고로 하고 있는데도 세비야 FC 의 홈경기라 그런지 베티스의 응원단은 비교적 소수였고, 오늘 경기의 홈팀인 세비야 FC 의 응원단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방방 뛰고 있었다.

 

급기야 베티스 응원단과 세비야 FC 응원단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물병 같은 게 계속 양쪽으로 날아다녔고 경기가 시작되자 세비야 FC 응원단의 한 남자가 경기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베티스의 골키퍼를 넘어뜨리려다 골키퍼가 살짝 피하는 바람에 자기가 나자빠지는 웃지 못할 일이 생기기도 했다. 분위기는 험악했지만, 내 입장에서 사실 재미는 있었다.

 

일단 거의 맨 앞 자리에 가까운 비싼 좌석 표를 샀더니 선수들이 바로 내 코앞에서 왔다갔다 하는 듯 가깝게 보여서 좋았다. 베티스 팀의 유니폼은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유니폼처럼 몸에 딱 달라붙는 쫄티였는데, 그 때문에 호아킨이나 알폰소, 데니우손 등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몸매를 지닌 축구 선수들의 화려한 움직임이 더욱 강조되어 눈에 들어왔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브라질 출신 흑인 선수 데니우손으로, 몸 움직임이 흑표범을 연상케 할 정도로 기가 막히게 멋있었다. 하지만 데니우손은 여전히 볼 끌기 버릇을 버리지 못해 경기 중간에 교체되었고, 결국 첫 골은 베티스의 골잡이인 호아킨이 헤딩으로 넣어 1 대 0 으로 베티스가 앞서 나가게 되었다.

 

한때 세계 최고 몸값을 기록했던 브라질의 명드리블러 데니우손. 그러나 혼자 공을 너무 오래 잡고 끄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더욱 재미있는 것은 경기가 아니라 관중들의 모습이었다. 내 옆에는 빨간 바지를 입은 한 아주머니가 앉았는데, FC 세비야의 광팬인 모양이었다. 상대팀이 프리킥을 찰 때면 성호를 그으며 성모 마리아께 제발 우리팀이 잘 방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두손 모아 기도할 정도였으니 아주머니의 정성이 갸륵해서인지 아니면 FC 세비야 응원단의 광적인 응원에 베티스 선수들이 얼이 빠져서 그런지 결국 베티스 수비수가 자책골을 넣는 통에 경기는 1 대 1 , 동점이 되었다.

 

FC 세비야 응원단들은 기쁨에 겨워 소리소리 질렀고 모두 일제히 일어나 발을 구르며 플라멩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도 앞이 가려 일어섰는데 뒤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앉아 계셨던 것이 생각나 언짢아 하실까봐 뒤를 돌아 보았더니 머리가 하얀 호호백발 할머니가 기쁨에 겨워 요염한 포즈를 취한 채 일어서 노래까지 곁들이며 플라멩코를 추고 계시는 것이었다.

 

경기는 그렇게 무승부로 끝이 났고 강팀이던 베티스를 상대로 약팀인 FC 세비야가 무승부를 기록했으니 경기장 안이고 밖이고 야단이 났다. 세비야 팀 깃발을 흔들며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를 하고, 자동차들이 응원 리듬으로 경적을 울리고 다녔으니 그들에겐 ' 프로팀 경기 무승부' 가 ' 우리나라 월드컵 4 강 ' 과 맞먹는 기쁨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갑자기 세비야 사람들이 나한테 아는 체를 하기 시작했다.

 

괜히 나한테 ' Buenas Noches~~~' 하며 인사하고 가는 사람, 나한테 얼굴을 내밀며 손을 흔드는 사람, 오토바이 타고 가던 한 쌍의 연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나에게 뭐라뭐라 소리를 질렀으니 그동안 외로울 때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 사람 섭섭하게 만들던 스페인 사람들이 자기들 기분 좋으니까 갑자기 남미 사람들처럼 살갑게 굴기 시작하는 것이 조금 얄밉기도 했지만 나로써도 세비야 사람들의 뜨거운 본성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꽤 좋은 경험이 된 셈이었다.

 

간간히 보이는 베티스 응원단 사람들은 침울한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호아킨을 비롯한 베티스 선수들은 마치 전쟁 같았던 경기가 끝난 뒤 거의 다 빠져나가 몇몇 남아 있지 않았던 베티스 응원단을 향해 깎듯이 인사하고 들어가는 좋은 매너를 보여줬다. 그렇게 나는 재미있게 경기를 관람하고 왔지만, 숙소로 돌아와 TV 를 틀어보니 세비야 축구장이 평소에도 늘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호나우두가 스페인리그 첫 경기에서 2 골을 넣으며 맹활약했다는 메인 뉴스 다음에 나오는 것이 바로 ' 오늘 세비야의 축구장에서 사상 최악의 관중 난동이 일어났다 ' 는 뉴스였기 때문이었다. 경기장 앞에서도 경찰과 관중들 간에 대치가 있었고, 관중석에서도 일부 관중들이 경찰들을 구타해 그게 다 TV 카메라에 잡힌 모양인데, 그 때문에 이후 1 주일 내내 ' 세비야 시민들의 무질서와 야만성 ' 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그물이 뜯어져 관중 난입이 쉬웠던 세비야 경기장 모습. 상대편 베티스 선수가 코너킥을 차려하자 관중들이 아우성을 치며 방해하고 있다. ( 촬영: 장혜영 )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꼭 그 관중들 탓만 할 일도 아니었다. 경기장 앞에서 경찰들이 말을 타고 공포탄을 쏘며 위압적으로 다니는 통에 말 다리 아래에서 위로 올려 보아야 했던 젊은 애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던 같고, 그리고 평소부터 이 동네 청년들과 경찰들 사이에 뭔가 뿌리깊은 악감정이 좀 있는 것 같았다. 카르멘과 세빌리아의 이발사 피가로와 플라멩코와 투우의 고향인 세비야, 그렇게 안달루시아는 마드리드와 축구문화에서부터 너무도 달랐다.

 

이후 스페인 축구계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라울은 부상을 극복하고 레알 마드리드에서 호나우두와 투톱을 이루며 스페인의 간판 선수로써 명성을 다시 되찾았다. 호아킨은 계속 주가가 올라가 레알 마드리드 팀에서도 영입을 추진하고 있어 어쩌면 자신의 우상인 루이스 피구와 함께 뛰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기분 좋은 상황에 처해 있다.

 

어쨌든 스페인에서의 축구 관람,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고 유명한 선수들을 보는 재미도 좋았지만 그보다는 스페인 사람들의 기질을 확실하게 엿볼 수 있어 더욱 좋았던 관람이었다. 그 지역 사람들의 본 모습을 보고 싶으면 경기장으로 가라 ~~~ [끝]

 

* P.S. >> 이젠 우리 국민 가요가 되어 버린 ' 오 필승 코리아 ' 의 선율은 어디서 나왔을까? ' 오 ~~~ 필승 꼬레아 ' 의 선율은 몇 년 전부터 레알 마드리드 팀의 응원가로 불리워져 오고 있는 멜로디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게다고 그 멜로디의 원조가 레알 마드리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8 강전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