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마추피추/티티카카 호수 여행기] 그 여름, 인디헤나들의 크리스마스 (여행기간 2005 년 12월)
장혜영
페루는 음악이 좋다. 또 사람들이 좋은 멜로디와 가사를 즐길 줄을 안다, 비록 그 가사들이 슬픈 현실을 직설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하더라도. 페루 여행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마추피추로 올라가는 버스에 타 앉아 있을 때 ‘ 메리 크리스마스’ 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내 아이에게 장난감 하나 사주지 못하는 이 가난하고 불쌍한 인디헤나1) 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
리마에서 쿠스코로
라틴 아메리카2)의 심장부, 남아메리카의 북쪽에 위치한 안데스 고산 국가 페루의 수도는 리마로 태평양 바닷가에 있는 크고 복잡한 대도시이다. 멕시코시티와 비교해서 별 다를 게 없는, 전형적인 스페인 식민지 스타일의 대도시이지만 크리스마스를 맞아 색깔 전등으로 예쁘게 단장한 리마의 중심가 역사지구는 페루 사람들의 모습처럼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거리에 넘쳐나는 티코 택시들은 한국 떠나온 뒤 두 번째 크리스마스를 앞둔 이방인에게 친근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페루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꼽히는 마추피추에 가려면 이 리마에서 쿠스코로 넘어가야 한다. 쿠스코, 3400 미터의 높이에 위치한 고지이면서 옛 잉카 제국의 수도이다. 다들 고산병에 시달린다는 데 나는 별 상관이 없었으나 공항에서 나와 바라본 쿠스코의 첫 인상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전 남아메리카를 지배했다는 옛 잉카 제국의 수도가 완전히 벽촌처럼 보이는 것이다. 붉은 먼지 휘날리는 길에 내셔널 지오그래픽에나 나올 듯한 옷차림의 여자들, 양갈래로 머리 땋고 어깨에 보따리를 맨 전통 복장의 여인들... 나중에 있다 보니 벽촌이 아니라 있을 건 다 있고 어차피 관광객 대상의 도시이니 만큼 굳이 개발을 하지 않고 옛 모습을 지키고 있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어쨌든 대도시 리마와는 또다른 세계였다.
쿠스코에서 볼만한 것은 역시 잉카의 돌담들. 돌담을 쌓을 때 보통은 돌을 층층이 쌓거나 아니면 회반죽, 혹은 지금 같으면 시멘트에다 돌을 팍팍 박아 넣는 형태가 되는데 이 사람들은 돌을 깎아서 귀퉁이를 정확하게 맞추어 쌓았다. 정말 틈이 하나 보이지 않게 잘 맞췄고 그중에 제일 유명한 것은 12각을 가진 돌로 12개의 모서리를 깎아내 나머지 돌들과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게 기교를 부린 그 돌 앞엔 매일같이 잉카인 복장을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새벽에 길에 나와 보니 그 사람이 그 돌담 앞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설마 빼 갈 수도 없는 돌을 지키는 건 아닐 터이고 집이 없는 모양인데 밤의 쿠스코는 아무리 여름3)이라도 정말로 추운데 어떻게 버티는 건지 모르겠다.
사진1)쿠스코: 면도날도 안들간다는 잉카의 유명한 돌깎아 맞추기 기술, 촬영:장혜영
여기서부터 페루의 심란스러운 현실로의 여행이 시작되는 셈인데 그 외에 또 볼 것은 스페인 사람들이 일부러 잉카의 신전 터 위에다 백년에 걸쳐 정성스레 지었다는 쿠스코 대성당. 정말 내부를 금으로 칠갑을 해놓았다. 금칠한 성당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으리으리하게 또 기기묘묘한 형태의 성상들로 가득 채워진 데는 잘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중간에 제단 부분은 또 은으로 장식을 했는데 그 부분이 더 기품 있고 멋있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볼거리를 떠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쿠스코는 사람들에게 금방 정이 드는 곳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서 마추피추로 가는 교통수단은 기차 하나 뿐이었다.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마추피추 목전의 온천 마을
마추피추를 ‘공중도시’ 라는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는 것은 이 도시가 공중에서 내려다 보지 않으면 외부에서 전혀 안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 (공중 도시라 하길래 어릴 땐 공중에 붕 뜬 도시 말하는 줄 알았다) 원래 이곳은 잉카의 수도 쿠스코를 지키는 사방의 요새들 중에 하나였는데, 요새는 적으로부터 노출이 안 되야 요새 역할을 하니까 공중에서만 보이는 산봉우리로 싹 둘러싸인 이 지대에다 비밀 요새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스페인의 침략으로 잉카가 망하고 난 뒤(1532년) 남은 잉카인들이 여기로 숨어들어 하나의 도시를 이루며 살다가 스페인 사람들에게 들킬 것 같아지자 이 곳을 버리고 다시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고, 현재로선 그렇게 추정을 하고 있다.
이 마추피추로 들어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잉카 트레일이라고 3 박 4일에 걸쳐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지리산 종주를 생각하면 되겠는데 이게 문제가 일단 돈이 많이 든다. 그 3박 4일의 입장료가 상당히 비싸다. 그리고 왜 힘들게 옛 잉카인들이 걸었던 길을 걸으려 하는가? 이것도 어느 정도 환상이 있어야 된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잉카 트레일은 주로 돈도 좀 있고 페루와 잉카에 대한 낭만과 환상에 가득 차 여기 도착하는 구미 백인 관광객들이 많이 하는 것이지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별로 많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마추피추 관광의 가장 대중적인 방법은 쿠스코에서 당일치기 기차로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하루 한대 뿐인 기차가 아침 일찍 하고 오후 늦게, 딱 당일치기에 맞춰서 다니니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후다닥 뚝닥 정신없이 하루만에 마추피추를 보고 돌아갈 것인가, 쿠스코에서 마추피추 목전의 기차역인 아구아스 칼리엔테스까지 장장 4 시간이나 걸리는데. 그러니깐 나같이 삐딱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마추피추 목전의 기차역이 있는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서 하루 이틀 묵으면서 아침 일찍 마추피추에 올라가 하루종일 버티고 있다가 내려오게 된다.
어쨌든 위 세 방법 중 뭐로 가든 마추피추는 오직 기차로만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 잉카 트레일도 기차를 타고 가다 내려서 걸어가는 것이다 - 그래서 가끔 이 근처 주민들이 기찻길을 점거하고 쿠스코 당일치기 관광객들의 바쁜 시간을 볼모로 해서 ' 마추피추 관광 수입을 우리 가난한 인디헤나 (인디오) 들을 위해 써야한다' 고 데모를 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차는 외국인 관광객 전용으로 만들어서 값도 상당히 비싸다. 싼 내국인 전용 기차에는 외국인이 탈 수가 없다.
어쨌든 쿠스코에서 아구아스 칼리엔테스까지 4시간의 기차 여행은 쿠스코 주변의 빈민가에서 마추피추가 있는 깊은 산속으로의 여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 닿았을 때 정말 속세를 떠나 신선들의 세계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딱 한눈에 들어오는 자그만 마을인데도 워낙 산들이 험준하고 멋있고 계곡의 물은 파도치듯이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호텔이 계곡 바로 옆에 있었는데 그 계곡 물소리 때문에 결국 귀마개를 하고 잤다. 금강산 옥류동에 온 거 같기도 하고... 호텔에는 TV 가 없었다. 여기까지 와 놓고는 무슨 TV 냐, 세상 모든 거 잊고 마추피추와 산만 보라 이거다. 당연히 하루가 일찍 시작된다. 산속 사람들도 별로 할 일이 없으니 전부 아침 일찍부터 설친다. 그래서 다음날 일찍 7시쯤에 마추피추 올라가는 버스를 탔다.
마추피추, 신화와 전설 속의 유적지
사진2) 와이나 피추와 마추피추, 촬영:장혜영
마추피추는 그냥 엽서 사진 그 모양 딱 그대로다. 뒤에 산 있고, 돌로 쌓은 집들로 이루어진 유적, 그리고 계단식 논... 유적들은 역시 돌을 깎아 정확하게 귀퉁이를 맞추어 쌓았는데 그 기술은 놀랍지만 솔직히 말해서 자꾸 보다 보면 나중에는 그게 그거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보다는 그 마추피추를 둘러싼 자연이 더 멋진 데 가장 좋았던 것은 와이나 피추 봉우리, 마추피추 뒤에 웅장하게 서 있는 높은 봉우리 산 등반이었다.1 시간 반에서 2 시간이면 충분히 왕복 등반이 가능하니까 ‘ 그 정도면 장난이네 ’ 하고 마추피추에 도착하자마자 아침 일찍 올라갔는데 표고가 워낙 높은 지대인데다 등산화도 안신었지, 또 유적지에서 하루종일 버틸려고 가방에 짐을 잔뜩 넣고 등산을 하려니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힘든 만큼 가장 인상적인 와이나 피추가 아니었나 싶다. 거기서 발 아래로 내려다 보는 마추피추의 전경도 그림 같지만 역시 산을 오르면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정상도 아주 비좁아서 거기 올라간 사람들은 모르는 사이라도 어쩔 수 없이 옹기 종이 오붓하게 마주보며 앉게 되는데 여기 산에서 만난 젊은 관광객들은 비교적 다 괜찮은 애들로 그중 한명은 나중에 한 1 주일 뒤에 리마 공항에서 다시 마주치기도 했다. 등산이 힘드니까 다들 내려갈 생각을 않고 꼭대기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도 재미있었고...
그래도 나는 인티 푼쿠 생각이 나서 빗방울이 뜰 즈음에 급히 내려왔는데 인티 푼쿠는 ‘ 태양의 문’이라는 뜻으로, 와이나 피추 산봉우리와는 반대편 산쪽으로 왕복 1시간 조금 넘게 잡고 숲길을 향해 계속 올라가면 된다. 숲길도 좋고 여기가 잉카 트레일의 끝 지점으로 예전에 잉카인들이 미추피추에서 외부 세계로 걸어 다녔던 좁은 길이다. 거기 태양의 문에서 앉아서 마추피추를 바라보면 와이나 피추와는 또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셈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마추피추를 둘러싼 괜찮은 ‘길’ 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 잉카의 다리 ’ 코스로 왕복 3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나무가 우거진 깊은 숲길을 따라 쭉 들어가면 통나무로 이어진 잉카의 다리와 사람 하나 딱 설 수 있는 좁은 길이 천길 낭떠러지 옆에 뚫려 있는데 외부 적이 침입할 것 같으면 그 통나무를 떨어뜨려서 길을 끊어버리는 그런 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리가 문제가 아니고 가는 길에서 보면 이 마추피추 지대가 얼마가 깊은 산속에 만들어진 도시인지 느낄 수 있게 옆의 웅장한 산봉우리들과 그 사이 협곡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니까 와이나 피추 등반 2시간쯤, 인티 푼쿠 1시간, 잉카의 다리 30 분, 그리고 유적 보는 데 2시간 좀 넘게... 어쨌든 내가 아침 7 시쯤 올라가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 시간 때문에 4시 반 좀 넘어 내려왔으니 9 시간을 넘게 마추피추 지역에 죽치고 있었던 셈인데 그래도 뭔가 시간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 9 시간 중에 어디 앉아 있었던 시간은 1시간도 안되었던 것 같으니 8 시간을 걸어 다닌 셈인데 그날은 그래도 괜찮았으나 다음날 완전히 다리 병신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중간에 비도 좀 오고 구름이 간간이 많이 끼인 날씨였는데도 시커멓게 타서 껍질이 벗겨질 정도였으니 햇빛이 하루종일 내리쬔다면 여기 인디헤나들처럼 까맣게 되는 건 하루만에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페루의 인디헤나, 그들은 왜 그렇게 사는가?
여하튼 와이나 피추와 인티 푼쿠 다 돌고나서 돌로 쌓은 유적들을 보려고 하니 그때쯤 쿠스코에서 온 당일치기 외국인 관광객들은 다 돌아가고 여기 동네 주민들이나 주변에서 관광온 현지인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해 그들과 뒤섞이게 되었는데 상당히 소란스럽고 산만했다.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중년이상의 인디헤나 계통 여자들은 그들의 언어인 케츄아 어를 썼고 아이들은 다 스페인어를 썼는데 한 아이는 나만 보면 계속 ‘ 안녕하세요 ’ 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똑똑한 아이한테 ‘ 감사합니다 ’ 도 좀 가르쳐 주고 올 걸 그랬다 싶다. 어쨌든 마추피추 여행에서 받은 인상은 그런 것이다. 미국인 단체 관광객들의 웃고 떠드는 모습과 순박하나 다소 멍한 표정으로 보따리를 지고 걸어 다니는 여기 가난한 인디헤나들간의 대조... 같은 하늘 아래 태어나서 참 다르게 사는구나 하는 느낌...
내 결론은 대충 이렇다. 이 인디헤나 들이 왜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삶을 계속 이어가고 있냐 하면 일단 스페인이 잉카를 멸망시켰을 때 그들의 목표는 오직 금과 은 뿐이었다.그런데 이 깊은 산속, 높은 표고, 스페인 사람들로서는 고산병으로 쓰러질 만큼 열악한 이 안데스 지역에 굳이 교육을 시키고 학교를 짓고 뭐 이렇게 문명을 개발할 생각이 있을 턱이 없었을 것이다, 금만 빼앗아 가면 되는 거지.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그렇게 스페인 식민 시대에도 관심 밖으로 버려졌을 거고 독립 이후에도 정치는 저 밑에 리마 같은 저지대 바닷가 도시에서나 진행이 됐을 거고 20세기에 들어서도 마찬가지. 남아메리카의 20세기는 우리나라의 20세기 역사하고 거의 같이 가는데 군부 독재 시절에 그 군인 정치가들이 또 여기 이 산꼭대기 지역에 관심이나 있었겠는가. 아마 인디헤나들을 사람으로도 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몇백년동안 중심으로부터 내버려져 그냥 자기들 스타일 그대로 몇백년을 이어오며 살아온 것 같다.
덕분에, 이렇게 페루에 관광객이 많이 온다. 물질 문명에 질려있는 구미 관광객들이 볼 때 얼마나 멋지겠는가. 멋진 자연에다 드라마틱한 사연을 지닌 유적들, 그리고 요즘 세상에 찾아보기 힘든 똑같은 옷 입고 머리 땋고 다니는 인디헤나 여자들... 낭만 그 자체다. 구 잉카 제국에 환상을 가지고 잉카 트레일을 할 만도 하다. 하지만 잉카는 망했고 그 때문에 여기 이 사람들이 이렇게 산다. 너무나 오래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갑자기 바꿀 수도 없다. 하루 아침에 어느날 갑자기 그 번거로운 치마를 벗고 땋은 머리 확 자르고 신여성이 되라고 하면 그게 통하겠는가.
사진3)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촬영: 장혜영
다음날 쿠스코 돌아가는 기차 시각 전에 도무지 할 일이 없는데다 다리도 아프고 해서 이 동네의 이름인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스페인어로 뜨거운 물이라는 뜻) 의 어원이 되는 온천에 갔다. 목욕탕형 온천이 아니라 수영장형 온천이다.수영장 물이 뜨겁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온천보다도 그 온천에 올라가는 길이 환상이다.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계곡인데 떠올려봤자 갈 수 없는 한국 생각나게 만든다. 무주 구천동 비슷한 느낌이다.
그리고 동네 꼭대기에 있는 그 온천서 내려오다 한 가지 실수를 했는데 이 마을에 도착하던 첫날 한 식당에 들어갔다 나를 끝까지 일본 사람으로 믿은 종업원 녀석을 한명 만났었다. 애써 일본말 배웠는데 드디어 찬스다 생각하는 놈한테 나 일본 사람 아니야! 이렇게 완강하게 말도 못하겠고 이후로 이 손바닥 만한 마을에서 마주치지 않으려 조심을 했는데 마지막 날 아차 실수로 그 식당 앞을 지나가게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람같이 뛰어나와 ‘ 아리가또 ’ 어쩌고 또 시작이다. 여기 이발소가 한두개 뿐이라 그런지 전반적으로 젊은 남자애들이 머리를 귀엽게 어린아이 바가지 머리 스타일로 깎는데 여하튼 사람들은 좋다. 금방 정이 들게 된다. 그러니 참으로 웅장한 산과 넘쳐나 흐르는 물, 금방 정이 드는 귀여운 머리 스타일의 사람들이 있는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를 떠나려고 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쉬워서 마지막까지 기차역 앞의 벤치에 앉아 비 내리는 산속을 바라보고 있는데 잘 생긴 갈색 개 한 마리가 나타나 나를 지긋이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어디론가 휙 사라져 버린다. 마치 환영을 본 거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그 산속의 별세계를 떠나왔고 밤늦게 쿠스코에 도착해 거의 마비가 되어버린 다리를 끌고 쿠스코 시내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쿠스코에서의 마지막 하루가 남아 있었다.
쿠스코와 배낭족들
쿠스코에서의 마지막날, 우연히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 남미 여행일지인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4)’의 스페인어 원판 책을 싼 값에 구하게 되었다. 멕시코에서 못 구했던 책이라 횡재한 기분이었는데 사실 이번에 여행하면서도 이 책 생각, 영화 생각이 많이 났다. 전에 읽을 때는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의학도답게 인디헤나들의 위생 문제나 코카5) 잎을 너무 많이 먹는 문제에 대해 유별나게 민감하구나.. 싶었는데 나도 여기 와 보니 그게 좀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봤을 때 아르헨티나에서 뭐 아쉬운 것 없이 반듯하게 자란 이상주의자 의학도 게바라가 왜 남미 남부에서 페루 쪽으로 올라오는 여정의 끝에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다’라고까지 생각하게 됐는지 이해가 갔다. 젊은 혈기와 젊은 이상의 관점으로 봤을 때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겠는가.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헤나들은 모든 걸 뺏긴 삶을 살고 이민자들이 오히려 더 주인처럼 누리고 산다는 게.
그렇잖아도 마추피추와 쿠스코를 오가면서 젊은 배낭족들을 많이 만났다. 단체 여행객들은 미국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데 반해 배낭족들은 유럽 아이들이 많았는데 예전에 여행 다닐 땐 걔들에 관심이 없었음에도 이번에 여기 페루에 오는 젊은 배낭족들은 비교적 괜찮은 청년들이란 느낌을 많이 받았다. 와이나 피추 산에서 본 아이들도 그렇고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동네 뒷골목에서 뜨개질을 하면서 동네 아이들과 놀고 있던 백인 여자애도 그렇고 얘들은 스페인어도 어느 정도 배워서 오고 예의도 바른 게 젊은 이상주의자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람들 중엔 이 페루를 계속 떠돌며 집으로 안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이런 배낭족들은 쿠스코에서 티티카카 호수의 도시 푸노로 넘어가면서 거의 사라져 버렸다. 몇 명과 같이 버스를 타고 공항에서 푸노까지 가긴 했는데 걔네들은 볼리비아 국경을 넘으러 간다며 다시 떠나 버렸고 나머지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주로 단체 버스를 타고 다녔으니 나는 이제 진짜 아이마라 인디헤나들의 세계인 티티카카에 혼자 뚝 떨어져 버린 셈이 되었다.
호수라기엔 너무 큰 티티카카 호수와 뜨개질하는 남자들의 섬
티티카카 호수는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지대에 있는데 해발 3천8백 10미터, 그러니까 마추피추나 쿠스코보다도 더 높은 고지대에 바다같이 넓은 호수가 있는 셈이다. 그러니 말만 들어도 신비한 느낌을 주고 또 그래서인지 잉카의 초대 황제가 하늘에서 이 호수로 내려왔다고, 꼭 우리나라 단국 신화 같은 건국 신화의 배경이 되는 곳도 이 티티카카 호수인데 현재의 이곳은 변방 중에 변방으로 씁쓸한 페루의 현실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케추아 어를 쓰는 쿠스코-마추피추 지대와는 달리 아이마라 어를 쓰는 인디헤나들의 지역인 여기 관광은 호반도시 푸노를 기점으로 해서 세 군데로 나눠서 돌아다녔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은 우로스 섬. 티티카카 호수하면 딱 생각나는, 갈대를 쌓아서 만든 떠 있는 섬이 우로스 섬이다. 푸노에서 그리 멀지 않는데 한 3, 40분 배를 타고 이 섬들 중 하나에 내려서 역시 갈대로 엮어 만든 움집에서 뛰어나오는 한 인디헤나 아이를 봤을 때 든 생각은 사람이 이젠 원시인이 아닐 진데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때에 찌든 채 더러운 옷을 입고 뛰어나오는 어린 아이의 모습은 낭만은커녕 충격을 주었고 그래서 다소 절망적인(?) 기분으로 물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호수 쪽에서 배를 타고 지나가던 남자 두 명이 나를 보고 소리쳤다.
“ 조심해요 시뇨리타, 그러다가 호수에 빠지는 수가 있다니깐 ! ”
그래서 고개를 들고 그쪽을 바라보니 그러면 그렇지, 관광객용 섬은 이렇게 집까지 다 갈대로 엮어서 움집을 지어 살고 있지만 대부분의 우로스 섬 주민들은 양철 지붕을 이은, 그럭저럭 사람 사는 집 같은데서 비교적 깨끗한 옷을 입고 살고 있었다. 학교도 있고 마을 회관 같은 것도 있고 라디오도 나오는 게 뭐 하늘 아래 내 땅 한점 없는 사람들로서는 이것도 괜찮은 내 집 마련(?) 방법이겠는데 가장 문제는 먹는 물 문제일 것 같다. 섬으로 수도를 끌어들일 수는 없으니 빗물을 모아 식수로 쓰는 것 같던데 위생 문제를 생각 안할 수가 없다. 여기 사는 사람들이나 관광 온 근처 시골 사람들이나 여자들은 옷차림이 비슷해 사실 누가 관광객이고 누가 주민인지 잘 구분이 안갔는데 어쨌든 우로스 섬의 아줌마들은 나룻배도 잘 젓고 넉넉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닌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진4) 우로스 섬의 관광객용 배, 촬영: 장혜영
하지만 티티카카 호수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은 남긴 곳은 타킬레 섬일 것이다. ' 뜨개질 하는 남자들의 섬’ 에 대한 TV 프로를 본 적이 있는지? 나는 예전에 KBS 였는지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이 섬으로 가고 있으면서도 여기가 거긴지도 모르며 가고 있었다. 타킬레 섬은 푸노에서 배를 타고 3 시간 정도 들어가야 나오는데 어쩌다 보니 외국인 관광객들이 타는 배 대신 섬 주민들이 타는 배에 끼여 타게 되었다. 고립된 섬으로 들어가는 배니 어떻겠는가, 각종 음료수니 식품이니 화물로 꽉 차 그 화물들에 깔려 가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 비좁은 배에서 남자들이 전부 똑같은 모자를 쓰고 있다. 그런데 조금 젊어 보이는 남자 한명이 자기 가방을 뒤지더니 조금 다른 모자, 산타클로스 모자 같은 걸 꺼내더니 그걸 섬에 당도하기 전에 뒤집어 쓰고 사람들에게 코카잎을 나눠준다. 사람들은 전부 그걸 받아 주머니에 넣거나 하더니 중국 사람들 호박씨 까 먹듯 계속 꺼내 씹어 먹는다. 코카 잎을 과자 먹듯 하는 풍경을 처음 제대로 본 셈인데 약간 충격적이었다. 저걸 저래 많이 먹어서 좋을까? 싶기도 하고 따로 딱히 심심풀이 과자가 없으니까 저걸 저렇게 계속 씹어 먹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근데 그것보다 그 남자들의 뜨개 모자들을 쳐다보다 보니 딱 떠오른 게 그 ‘ 뜨개질 하는 남자들의 섬’ 이었다.
타킬레 섬 사람들은 전부 뜨개질과 천 짜는 일을 하는데, 여자들은 주로 실을 잣거나 천을 짜거나 바느질 같은 일을 하고, 남자들이 주로 뜨개질을 한다. 그래서 뜨개질 감을 허리에 차고 다니다가 시간 날 때마다 꺼내서 뜨개질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직접 뜬 뜨개 모자로 나타내는데, 결혼한 남자들은 알록달록하게 뜬 빨간 색 계통 모자를, 그리고 미혼남들은 끝에 술이 달린 산타 모자 같은 걸 꼭 쓰고 다닌다. 그리고 또 어린 여자 아이들을 위한 꽃모자 같은 것도 있다. 그런데 이 섬 사람들은 왜 이렇게 모자로 자신을 표시하며 다닐까? 거기에 대한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쨌든 참 독특한 문화이니만큼 인류학자들의 연구 대상이라 한다.
사진5) 타킬레 섬의 아치, 술이 달린 흰 모자가 총각용, 알록달록한 것이 기혼자 용이다. 촬영: 장혜영
하여튼 밤에 티티카카 호수는 날씨가 안좋기 때문에 섬에 들어가는 배는 아침 일찍 출발하는데 비가 와서 갑판에 나가 있지도 못하겠고 비교적 잘 안 씻는 섬사람들 몸 냄새에다 화물 냄새, 거기다 어딘지 좀 역하게 느껴지는 코카잎 냄새로 가득 차 불편하기 짝이 없는 배가 기상악화로 마구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이러다 티티카카 호수의 물귀신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배는 섬에 무사히 닿았지만 나는 이미 파김치가 된 기분이었고 관광객용 배는 이미 도착해 사람들이 다 올라가 버린 섬에는 인류학자인지 뭔지 섬에서 어제 하룻밤 묵은 외국인 관광객이 ‘ 질렸다 ’ 는 표정으로 돌아갈 배만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문명과 거리가 먼 섬에서의 1박이 피곤하긴 했겠지... 배타고 오는 것만 해도 이렇게 피곤한데...
하지만 섬에 도착해서 날이 개이기 시작하며 햇빛아래 푸르게 빛나는 티티카카를 섬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건 정말 멋있었다. 그리고 섬 사람들도 좋았고... 돌아올 때는 좋은 날씨에 배 지붕 위 의자에 앉아서 푸른 티티카카 호수를 실컷 봤는데 섬에서 나오는 젊은 사람들 둘과 함께 앉아 왔다. 그 둘은 뭍으로 가는 세시간 동안 이어폰을 한짝씩 나눠 꽂고 영어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아마 뭍으로 나가서 외국인 상대로 판매원이나 종업원을 하거나 하지 않을까 싶었다. 섬의 중년 이상 사람들이 다 케추아 어를 쓰는 데 반에 젊은 사람들은 또 다 스페인어를 썼다. 그래서 말을 한번 걸어봤는데 둘이서 얘기 하는 것 보면 밝고 쾌활하던 이 섬 젊은이들이 외국인인 내가 말을 걸었더니 그저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나는 혹시 배삯을 바가지 썼나 싶어 한번 물어본 건데 둘이서 그렇게 잘 떠들던 사람들이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들고 대답을 하는 데 길게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사진6) 타킬레 섬의 여자들, 촬영:장혜영
어쨌든 타킬레 섬..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 섬 사람들은 이 티티카카 호수 주변의 다른 인디헤나들과는 달리 케추아 어를 쓰는 데 결국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란 얘기다. 그런데 왜 전부 뜨개질을 하느냐? 섬에서 할 일이 있어야지... 섬에서 뭍까지 거리도 너무 멀거니와 배삯도 비싸다. 거의 뭍으로 나가기가 힘들단 얘긴데 차라리 뜨개질로 자신들의 상품을 특화한 건 오히려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 타킬레 섬에서, 그 섬 남자들이 뜬 모자랑 조끼 하나씩을 사서 왔다. 말 그대로 100 프로 핸드메이드이다. 알록달록한 뜨개질 부분뿐만 아니라 천도 다 손으로 짠 거고 그 실도 다 손으로 잣아 낸 백프로 핸드 메이드...
볼리비아 국경에서의 마지막 사색
티티카카 호반 도시 푸노에는 비행기가 없고 근처 도시 훌리아카 공항에서 내린 뒤 쭉 뻗은 길을 따라 한참을 달려야 호반 도시 푸노가 나온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쿠스코에서 푸노까지 열시간에서 열두시간 정도 걸리는 기차가 있는데 그걸 타는 것도 괜찮았겠다 싶었다. 어쨌든 훌리아카에서 푸노까지 합승 봉고를 타고 왔는데 봉고 속에 두 배낭족, 자기들은 푸노에 안머무르고 볼리비아 국경을 넘어간다고 아주 비장하게 말한다. 현지인도 아주 위험한 듯 얘기를 해서 - 밤시간이라 그렇게 말한 듯- 나도 비장하게 속으로 안전을 빌어주었는데 나중에 나도 가봤는데 별 거 아니었다. 국경 관리 공무원들이 문제였을 뿐...
티티카카 호수 지역은 여름이라도 밤이면 엄청 춥다. 워낙 높은 고지대라서 그런데 크리스마스 이브날 푸노 대성당에서 가서 미사 음악 녹음하고 왔는데 그 다음 크리스마스날 하루 시간도 남는 것 같아 볼리비아 쪽 티티카카에 있는 코파카바나라는 휴양지에 다녀올까 생각을 했다. 여기 도착하던 날 볼리비아 간다던 그 두 놈 생각도 나고 해서 그런 건데 나는 국경 가는 버스는 뭐 좋은 버스가 있을 줄 알았다. 근데 조그만 봉고 버스 하나밖에 없었다. 이걸 타고 두시간 반에서 세시간 쯤 걸리는 국경까지 간다라...
그래도 마음 바꾸기도 싫고 해서 만원 봉고 버스를 타고 티티카카 호수 주변을 따라 쭉 가보았는데 그렇게 버스를 타고 세시간쯤 날라 가도 한 티티카카 호수의 5 분의 1 정도밖에 볼 수가 없으니 정말 크긴 크구나 싶었다.티티카카 호수 주변 풍경은 푸른 호수를 배경으로 양 치고 있는 인디헤나들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넓고, 조용하고, 드문드문 사람과 양들이 한번씩 나타났다. 나중에 가서는 풍경이 너무 비슷해서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잤다가 깼다가 하다 보니 융구요에 다다라 있었다. 누런 먼지가 휘날리는 황량한 국경 도시에 뚝 떨어지고 보니 처음엔 내가 미쳤지... 싶은 생각만 들었다. 진짜 누가 뒷통수 한대 치고 가방 뺏어가도 아무 대책이 없을 황무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누런 먼지가 가라앉은 길을 따라 코너를 돌아가니 그래도 가게도 있고 인터넷 까페도 있는, 갖출 것은 그럭저럭 다 갖춘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광장엔 어김없이 성당이 있었고 크리스마스라 성당엔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전부 여자들이 인디헤나들 복장에 어깨에 특유의 색동 보따리를 매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들도 한결같이 새까맣게 탄 피부에 이번에 볼리비아 대통령에 당선된 에보 모랄레스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이 동네야말로 진짜 아이마라 인디헤나들의 세계이구나 싶었다. 인디헤나 여자들 복장이라는 게 머리 양 갈래로 땋고, 모자 쓰고, 무릎까지 오는 폭 넓은 치마에다 스타킹, 그리고 색동 보따리를 어깨에 딱 매고 있는 건데 그날은 크리스마스에다 세례식이 있어서 나름대로 멋을 부리고 깨끗하게 단장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멋을 냈다는 건 똑같은 형태의 옷이라도 치마천도 좀 좋은 걸로 하고, 구슬 장식 달린 쇼올 같은 것도 두르고 머리도 동백기름 같은 걸 발라 윤기가 흐르게 하고 그런 식인데 그런 인디헤나 아줌마들이 성당에 꽉 차 자기 아이들이나 손자들 세례식을 구경하고 있는데 신부님이 강론할 동안은 졸고 있다가 자기 아이 이름 부르면 벌떡 깨고는 하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내가 듣기에도 강론이 좀 지겹기는 했다. 하여튼 여기서 국경까지 가는 택시를 탔는데, 물론 합승이긴 했지만 50 센타보, 백오십원 정도 했다. 이런 페루 변방의 물가는 정말 돈이 돈이 아니게 싸다. 그래서 드디어 페루 볼리비아 간 국경을 넘으려 했는데...
나도 전혀 예상을 못했던 건데 볼리비아에 비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남미에서 거의 유일한 비자 국가가 볼리비아가 아닌가 싶은데6) 20 달러 내면 즉석에서 비자 발급이 된다지만 이 국경 관리 관료들 표정을 보니 외국인한테 돈 뜯어내려고 눈이 번들번들한 게 자칫 잘못하다간 못 돌아오는 경우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 포기했다. 그 사람들한테 여권 맡기는 것조차 불안한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페루쪽 관리가 두명이 있었는데 한명은 젊은 사람이고 한명은 나이가 많았다. 나는 당연히 나이 많은 사람이 책임자이고 젊은 사람이 조수인 줄 알았는데, 완전히 거꾸로로 젊은 사람은 이런 변방 국경의 부패를 청산해 보고자 중앙에서 직접 파견한 관리이고, 나이 많은 사람은 이 지역에서 오래 있은 말단으로 그 젊은 장 몰래 관광객들 돈 뜯어내려고 눈이 번들번들한 전형적인 부패 관리였던 것이다.
하여튼 역시 중앙의 감시로부터 떨어진 변방이 문제다.. 라는 생각을 하며 페루 - 볼리비아 국경에 있는 성당이나 구경하고 고요한 티티카카 호수를 감상하며 다시 융구요로 걸어내려왔다. 그래도 융구요는 읍내라고 국경에 바로 붙은 동네는 또다른 벽촌처럼 느껴졌는데 사람들은 너무 좋아서 전부 다 나한테 인사하고 지나간다. 게다가 양들이랑 엉켜 앉아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내가 그렇게 신기한지 저 멀리서 걸어올 때부터 눈을 떼지 않다가 대견한 듯한 표정을 하곤 ‘ 볼리비아에서 오는 길이구만 ! ’ 이러신다. 사실 아닌데...
사진7) 융구요 마을 풍경, 촬영:장혜영
어쨌든 이 국경 마을 여행은 별다른 볼거리는 없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진짜 아이마라 인디헤나들의 세계를 봤다는 면에서 가장 인상 깊은 여정길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 올라탔더니 자리가 없어 다시 내리려 했는데 그때 맨 앞자리에 앉아 뜨개질하고 잇던 인디헤나 아줌마가 자기 보따리를 툭 치우면서 ‘ 여기 앉으면 돼!’ 한다. 그래서 얼떨결에 '예' 하고 시키는 데로 짐칸에 앉아 왔는데 허리가 아파 죽는 줄 알았다. 여하튼 사람들은 좋고 대하기 편한데 내가 봐도 한가지 문제가 이 사람들의 위생 관념이었다. 원래는 배가 고파서 그 국경 마을에서 점심을 사 먹으려 했는데, 일요일에다 크리스마스가 문을 연 식당이 거의 없었다. 근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안먹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들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돌아온 푸노에 비가 내려서 비닐 비옷을 걸치고도 덜덜 떨면서 푸노에 딱 두개 있는 중국 식당에 들어갔는데 거기까지 흘러 들어와 하루 종일 밥 볶고 있는 중국 사람들에 대한 연민도 조금은 작용했다. 그런데 이런 식당에 보면 젊은 사람 둘이 뭘 먹고 있는데 내 눈에는 다소 남루해 보이는 인디헤나 전통 복장의 아줌마가 들어와 그들에게 간다. 나는 동냥하는 사람이 들어 왔구나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아줌마 젊은 사람들한테 가서 '한푼 줍쇼’하는 게 아니라 옆 자리에 가 앉는다. 그 아줌마는 그 젊은 사람들의 엄마였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이 지역은 구세대와 신세대의 옷차림, 언어, (아이마라어와 스페인어) 모든 면에서 완전히 차이가 난다. 결국에는 그들도 흐르는 세월의 흐름을 막지 못하고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또다른 인디헤나들의 세계 치아파스
페루에 다녀온 지 반년 뒤, 이번엔 멕시코의 여름에 치아파스를 갔다. 이곳은 마야 인디헤나들의 땅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원래 주인이 그들이었다 할지언정 지금 남아 있는 인디헤나들의 지역이라고는 페루와 볼리비아(잉카), 그리고 이 멕시코 치아파스와 과테말라(마야) 지역 정도 밖에 없다.7) 여러모로 페루를 생각나게 하는 치아파스에서 나는 그들의 세계를 좀더 열린 마음을 갖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자 나의 페루 여행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때 내가 너무 편협한 생각에 빠져 있지 않았던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삶을 향유하고 있는데 내가 너무 문명적인 관점에서 부정적인 생각에 빠졌던 것은 아니었던가?
나는 지금 멕시코시티에서 도시 중산 서민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교사들과 함께 문화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공부는 할 만큼 했고 그럭저럭 살기는 하지만 생활이 빠듯한 편이라 동료들에게 맥주 한 병 쏘는 것도 아끼는 실속주의자들인 그들은 수업도중에‘인디헤나’들에 대한 얘기를 자주 꺼낸다. 한마디로 인디헤나들과 자신들은 다르다는 전제를 깔고 꺼내는 얘기들이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우리가 편견을 버리고 열린 시각으로 다가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생각이다. 인디헤나와 우리 멕시칸들은 달라, 동남아 사람들과 우리 한국 사람은 달라, 흑인들과 우리 백인들은 달라... 하지만 난 언제가는 나의 멕시칸 동료들에게 이 말을 해줄 생각이다. 인디헤나들과 너네들이 뭐가 다르냐고, 이방인인 내가 보기엔 똑같은 멕시칸이라고, 그러니까 인디헤나라고 따로 부르지 말라고... 그리고 적어도 내 삶의 여정이 계속되는 한 편견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싶다고, 그 노력만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1) 아메리카 대륙에 살아온 현지 토착민을 이를 때 예전에는 인디오 Indio 라는 표현도 썼으나 이 표현이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서 이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인디헤나 Indigena 라는 용어를 반드시 사용한다.
2) 한국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을 구분할 때 북미‘ 와 ‘중남미’ 라는 표현을 자주 쓰나 이것은 지리적 개념으로 멕시코의 경우 북미냐 중미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분류인 앵글로 아메리카 (미국, 캐나다) 와 라틴 아메리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를 쓰는 멕시코 이남 지역의 국가들) 가 좀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3) 페루는 남반구에 있기 때문에 12 월이 여름인 셈이다.
4) Guevara, Ernesto, Diarios de motocicleta: Notas de Viaje por America Latina, Buenos Aires, Planeta, 2004. 원제 Notas de Viaje 를 영화의 성공 후 체 게바라 유족들의 프롤로그를 덧붙여 다시 출판한 것이다.
5) 코카 Coca, 코카인의 재료가 되는 이 잎은 안데스 고산지대 사람들에게는 식생활의 필수품으로 찻물에 우려내 마시기도 하고 그냥 과자처럼 씹어 먹기도 한다. 원료 자체는 크게 최면 효과가 있는 게 아니고 고산 지대 사람들의 두통을 조금 완화시켜주는 정도인데 이것이 코카인의 원료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안데스 국가들이 코카의 재배 및 판매를 금지해야 한다고 정치적 압력을 넣는 바람에 국가간의 자존심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그 결과 코카 재배 농민 출신인 에보 모랄레스가 볼리비아의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다.
6) 파라과이도 비자 필요. 단 자유 무역 지대인 Ciudad del este 는 비자 없이 들어갈 수 있음.
7) 파라과이와 브라질 접경의 과라니, 그리고 아마존 지역에 여전히 인디헤나들이 살고 있으나 그들은 잉카 제국이나 마야, 아스테카 같은 대규모 문명과 국가를 이룬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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