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 무대가 연상되는 연출미의 <조씨고아>
‘조씨고아’는 <사기>를 바탕으로 해서 13 세기 후반에 쓰여진 중국 원나라 때의 원곡(가극류)으로 서양에도 18세기때 번안되어 소개됐다 하는데 실은 나도 잘 몰랐었다. 그러다 요즘 중화 TV 인가, 케이블의 어느 채널에서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를 해주던데 현란한 액션 대신에 대화 위주로 극을 풀어나가 호흡이 느린데도 음악이나 장면 묘사가 예사롭지 않은 게 눈길을 끄는 것이다. 한 집안의 복수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터라 동양의 ‘햄릿’이란 수식이 많던데 햄릿은 훨씬 뒷 세대 작품이고 내가 보기엔 그리스 비극의 원초적인 ‘복수’ 스토리에다 성서 등 여느 종교 서적에나 나올 법한 ‘희생’ 의 도를 담은 ‘드라마’틱 윤리 교과서 같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춘추 전국 시대의 진(晉)나라, 간신 도안고의 획책으로 충신 조씨의 집안이 억울하게 멸족 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 집안 사람도 아닌 정영이 같은 날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대신 희생시키고 조씨 집안의 마지막 혈육인 조씨 집안의 고아 조무를 살린다. 이후 정영은 조씨를 멸문시킨 도안고의 아들 무강과 자신의 아들 대업으로 둔갑시킨 조무를 함께 교육시키게 되는데 정영의 교육을 받은 도안고의 아들 무강에 의해 도안고는 몰락하고 조무는 집안의 복수를 하게 되며 정영은 모든 일이 정리된 뒤 생을 마감한다는 얘기다. 드라마는 주인공 정영을 의원으로 설정하고 아내와의 관계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일단 중국 사극이나 시대극들이 우리나라 같은 쪽대본이 아닌 사전 제작이라서 완성도도 높고 배우들도 훈련이 잘 돼 있는 편이고 그래서 그런지 이 드라마 자체도 잘 만들었는데, 그보다는 '땅콩 회항' 사건이나 드라마 미생에 나타난 직장 상사의 행태 등에서 보듯 돈과 권력 앞에서는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개나 줘버려’야 하는 게 ‘정상’이 되는 분위기가 팽배한 요즘에 윤리 교과서 같은 고전적인 가치관들을 줄줄이 읊어대는 정영의 대사들을 듣고 있자니 새삼스런 감동이 밀려온다. 게다가 조무를 구하기 위해 줄줄이 목숨을 내놓던 이들, 가족이 입은 은혜와 자신이 입은 은혜를 모두 갚기 위해 조무를 구한 뒤 자살하던 도안고의 집사 차주, 자신의 자식을 버리면서까지 도성의 아이들과 조씨 가문의 고아를 살리려던 정영, 초나라를 위해 스스로 제 가슴에 칼을 꽂던 초아 등등…
정영이 도안고의 아들을 올바르게 교육시켜 아버지의 악행을 막게 하는 대목은 장 자크 루소의 ‘에밀’ 을 연상케 했는데 이 부분은 드라마적 각색일 거 같지만 아무튼 볼테르 등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이 이 ‘조씨고아’ 작품에 열광했다던데 왜 그랬는지는 짐작이 간다.
정영이 이 세상 모든 가치는 결국 ‘사람을 위할 줄 아는 선한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던 것이나, 삶의 척도는 무엇이 되어야 하겠냐는 질문에 그것은 나의 ‘양심’ 이라는 대답하던 것, 참으로 간만에 듣는 ‘양심’ 이라는 말,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단어, 양심껏 사는 것을 바보 같은 삶으로 천대받는 이 시대에 잊혀져 가던 두 글자. 내 양심대로 살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던 내 청춘의 꿈도 희미해진지 오래인데 이 드라마로 인해 번쩍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참 사건이 주로 대화를 통해 전달되는 데 그 대화도 상당히 느려서, 잠 오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중국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기도 할 거 같았다. 나도 단어 듣기 좀 익혔다. 대업 = 다예 대형 = 다거 등등, 정영과 도안고가 실질적인 라이벌 주인공들로 연기 대결을 벌이는데, 정영과 그의 부인 송향의 동반자적 삶의 모습도 보기 정겨웠다. 여배우의 연기도 자연스럽고 좋았고, 참 첸 카이거 감독이 갈우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천하영웅> 이라는 좀 엉뚱한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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