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술품 거리로 유명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산 텔모 지구, 이탈리아 산 텔모를 그리며 이민자들이 지은 이름이다.
마르 델 플라타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오니 12월 30, 31 일 이틀이 남아 있었다. 31 일은 가게들이 다 문을 닫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30 일 안에 멕시코로 사가지고 갈 것들을 다 사야 했는데 책 좀 사고, 음반 좀 사고 가요제로
그런데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이제 내 안방이야… 하는 식의 자만심에다 하필 역방향 의자에 앉는 바람에 버스의 진행 방향이 안보여 이 버스가 반대로 가다 못해 탱고의 발상지로 유명한 보카 지구를 지나 관광지도에도 안 나오는 이상한 동네로 빠지고 있는 것을 몰랐다. 아니 알아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는데…
그런데 세상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산동네가 완전히 브라질의 유명한 빈민촌 ‘파벨라’ 못지 않았다. 쓰레기 더미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아름다운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 진짜 모습이 이거였나 싶었다.
그런데 그전에 한번은 식당에 들어가 ‘ 토르티야’ 를 시켰는데 그게 멕시코의 옥수수 전병 토르티야가 아닌 스페인의 달걀찜 토르티야를 의미하는 것 까지는 알고 시켰지만 그게 피자 큰 거 한판 만하다는 걸 깜빡하고 시킨 통에 반 겨우 먹고 나머지는 싸가지고 나온 일이 있었다. 게다가 종업원이 정성스레 따뜻하게 데워서 뜨끈뜨끈하게 싸준 걸 들고 나오니 내 입장에서는 달걀찜을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더 먹을 수도 없고 음식이 아깝긴 아깝기도 해서, 어디 동냥자나 부랑자 없나 하고 찾았는데 자세히 보니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 한복판에 쓰레기통 뒤지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물론 페트병 같은 재활용품을 모으는 사람도 있었지만 먹을 거 찾는 사람도 그렇게 많은 거다. 지난 겨울에 왔을 때와는 달리 여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그렇게 달라져 있었던 거였다. 겨울에는 어차피 길에서 살면 얼어 죽으니까 이 사람들이 어떻게든 다 들어가 있었는데, 여름이니까 이 사람들이 다 쏟아져 나온 것이다. 물론 나는 한 여자애 한테 문제의 토르티야 반쪽을 줬고, 걔야 좋다고 받아갔다.
Tigre –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국경변의 도시
어쨌든 다음날 31 일에는 12 시에 호텔에서 나와서 다음날
일단 아르헨티나 근대사의 상징인 오월 광장은 다시 한번 가서 보고, 거기서 뭐 찾느라고 푸에르토 마데로에서 좀 헤매다 레티로에 가서 도심 기차 (이건 깨끗하다)를 타고 한국의 서울 수원 거리쯤에 있는 ‘티그레 Tigre’ 에 갔다. 예전에 어디서 여기가 좋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딱 도착해 보니…
역시 한 발짝만 떨어져도 지방이라 깔끔하게 정리된 도시에 태국의 수상시장이나 멕시코의 소치밀코 같은 수로가 보인다. 그래서 아, 여기서 배 타고 놀고 하는 그런 데구나.. 했는데 좀 규모가 달랐다. 그 수로는 놀고 먹자고 만든 인공적인 수로가 아니라 로사리오에서도 봤었던 파라나 강의 지류로 배를 타고 나가면 좀더 넒은 지류와 이어져 우루과이로 넘어갈 수도 있게 되어 있어 많은 수상 버스가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시간이 넉넉치 않아서 배는 못 타고 근처 맥도날드에나 가서 신용카드 결제하고 밥 먹어야지.. 했더니 버젓이 ‘
잘 부르는 건 다들 잘 알아서 노래가 끝나자 기차 안에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쳐줄 정도였다. 나도 수준 높은 음악을 선사한 사람한텐 돈을 준다는 게 철칙이라 동전 몇 개 꺼내려는데 보니까 옆 자리에 마주 앉은 백인 두명, 부자 동네인 팔레르모에 사는 백인 두 사람은 미동도 않는데 내 바로 앞에 짐에다가 어린 애기까지 끌어안고 탄 다소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자, 노래 듣는 동안 아주 즐거워 하더니 노래 끝나자 당장에 지갑을 연다. 원래 보면 없는 사람들이 더 잘 쓰고 감정에 충실하다.
하여튼 그렇게 엄청나게 더웠던 날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와 급히 간 곳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상징 오벨리스크였다. 여기서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신년 음악회를 하기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
다니엘 바렌보임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나중에 이스라엘로 귀화한 케이스다. 아르헨티나엔 유대인이 엄청 많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많이 넘어왔고 좀 아이러니한 것은 나치들도 2 차 대전 뒤에 이 아르헨티나로 도망을 와 아르헨티나가 신 나치의 종주국이라는 오명도 듣고 있다는 점이다.
하여튼 다니엘 바렌보임은 거장으로 인장 받은 음악가기 때문에 탱고 곡을 편곡한 연주야 정말 좋았다. 가르델과 피아솔라, 게다가 아르헨티나 언론의 표현에 따르면 ‘ 탱고의 애국가’ 라는 라 꿈빠르시따 까지… 하지만 로사리오만도 못했던 것은 그런 클래식 음악회에 의자도 안놓고 사람들이 전부 다 서서 보니 엄청 더운 날에 보통 피곤한 게 아니더라는 점이다.
게다가 엠프도 좀 안좋고 또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생각보다 조용할 때 조용해서 물 파는 장사들 조차 연주가 시작되면 침묵했는데 이 개념없는 외국 관광객들이 와서 영어로 떠들어 대는 통에 나중엔 전반적으로 시끄럽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하기야 미리 와서 기다려서 음악 듣는 사람들이랑 나중에 갈 데 없어 뒤늦게 와 끼어 들어온 사람들이랑 입장이 같겠는가…
어쨌든 그렇게 음악은 잘 들었는데 바렌보임이 ‘아르헨티나는 유럽 사람들이 만든 나라’ 라고 한 말은 조금 듣기에 그랬다. 내 생각엔 바렌보임 같은 유대인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갖는 사고 방식을 딱 보여주는 말인 것 같았다. 우리는 아시안이 아니라 유럽 사람이야, 백인이야…
유럽으로 생중계된 그날 음악회에서 함께 공연된 탱고. 사진 출처: DYN
뭐 하여튼 그거는 그거고, 더 큰 문제는 9 시반에 음악회가 끝나더니 무대에 불을 끄고 엠프를 철수시키더라는 점이다. 나는 당연히 그때부터 제야 행사를 시작해서 12 시에 맞춰 카운트 다운을 하는 새해 맞이 행사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밤새도록 새벽까지 길에서 먹고 놀고 하는 사람들이 이날 밤은 무조건 집으로 가서 가족과 함께 란다. 아르헨티나에서 멋지게 새해를 맞고 돌아가려 했더니, 호텔에서 쫓겨난(?) 몸으로 길에서 그냥 밍숭맹숭하게 맞을 판이니 내가 이렇게 갈 데 없을 때 자주 가는 곳, 대성당에 가보았다.
설마 신년 미사는 하겠지? 했더니만 역시 아르헨티나 성당은 성당이 아니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는 게 나더러 ‘ 신년 미사 같은 소리하고 있네, 여기가 멕시코인 줄 알아’ 이러는 거 같았다. 그러니 식당도 다 문닫아 밥 먹을 데도 없고, 극장이나 기타 상가야 더 말할 것도 없고 관광객들은 어디 갈 데가 없어서 다들 나처럼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가뭄에 콩 나듯 문을 연 식당은 사람들로 터져 나가고 있어 나는 들어갈 자리도 없었고…
그래서 차라리 공항에 빨리 가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이게 마지막인데.. 싶어 어디 마지막으로 맛있는 아르헨티나 커피 한잔이라도 마실 데 없을까 싶어 일단 버스를 타고 보았다. 그래서 문을 연 한 식당을 발견하고 버스에서 내렸는데 들어가 보니 커피 같은 건 없고 단일 메뉴가 3만원이 넘는다. 놀래서 나오니 그 건너편에서 배가 고파 힘도 없어 보이는 한 모녀가 길거리에 퍼져 앉아 있었다.
사실 그뿐이 아니었다. 아까는 한 남자가 자꾸 남들이 던지고 간 컵 같은 걸 들어서 흔들어 보길래 당근 배고픈 사람이다 싶어 내가 먹다 질린 땅콩 과자 봉지를 주섬주섬 꺼내다 보니 그 남자 벌써 저만치 가고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비슷한 위치로 돌아와 보니, 그 남자가 한 고급 호텔 앞에 내다 놓은 쓰레기를 뒤지고 있고 그 호텔 앞을 지키고 있던 직원이 제지하다 둘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 꼴을 보니 기가 차서 싸움도 말릴 겸 그 남자한테 땅콩과자 봉지를 줬더니 한편으로는 나한테 계속 고맙다 고맙다 하면서 한편으로는 계속 그 호텔 직원 쪽을 바라보고 욕을 하는 것이다. ‘ 배가 고파 먹을 거 찾는데 그걸 못하게 하다니, 니가 사람이야? 피도 눈물도 없어?’ 계속 이러는데 내가 보기엔 서로 괴로운 일이었다. 다들 신년을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해 도시전체가 철시해 버린 이날에 호텔 문밖에 서서 부랑자 쫓는 사람도 스스로 비참한 거고, 먹을 거 찾아 쓰레기통 뒤지는 입장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그란 부에노스 아이레스' 에는 극빈층의 사람들도 그렇게 많다. ( 사진출처: 아르헨티나 일간지 EL CLARIN )
그러니 사실은 내가 돌아다니다 보니까 집에 있는 사람들도 할 일이 없어서 그냥 폭죽이나 들고 길에 나와 있는데 이럴 때 좀 오벨리스크 앞에서 신년 행사 같은 거 하나 하면 어떨지, 돈 있는 사람들이야 비싼 레스토랑 예약해 3 만원 넘는 풀 코스 먹으며 우아하게 새해를 맞지만 돈 없는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때 이미 한 딱까리 선물 한다고 주머니가 텅텅 빈 판에 그런 데 갈 돈도 없고 집에서 멋지게 한 상 차릴 돈 역시 없고 내가 보기엔 전부 밍숭맹숭해 하고 있는 게 왜 그런 행사를 안 할까 싶었다. 행사 준비하는 사람들도 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도 이럴 때는 놀아야 하기 때문에?
어쨌든 보면 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확실히 돈에 연연은 안 하는 것 같았다. 이럴 때 혼자 가게 문 열거나 일하면 떼돈을 벌겠더니만 그걸 안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간에도 일을 하는 ‘독한 사람’ 들도 있었다. 돌아오는 데 어쩌다 보니 거의
내가 하도 뻔질나게 버스 타고 기차 타고 하다 보니 이 근처 사람들 장사꾼들은 훤하게 다 아는 데 세상에, 그 시간에 크기가 다른 네모난 가방 네개를 층층이 얹어 놓고 파는 아저씨랑 간단한 샌드위치 파는 거리 음식점, 그리고 꽃 파는 할아버지가 아직도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기차도 오늘은 10 시 이후에 안 다니고 터미널도 거의 다 불이 꺼진 마당에…
이렇게 사람없이 조용한 날은 거의 없는 레티로.터미널 및 역 주위로 형성된 재래시장으로 평소 활기가 넘치는 곳이 레티로다. 조금 지저분하긴 해도... 사진출처: http://www.cix.co.uk/~wesley/ian/buenosaires2.htm
결국 나는 거기서 그 사람들과 새해를 맞았다. 그 거리 음식점서 음료수 한잔 마시며 종업원들과 얘기 좀 하고, 동네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터뜨리는 불꽃놀이 폭죽 구경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비교적 가까이에 있는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걸어가면서 그 꽃파는 할아버지의 조그만 자스민 (치자) 꽃뭉치 하나 사고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려고 했는데, 그 할아버지의 꽃 노점 건너편에 집 없는 부랑자들이 여럿 앉아 있는 통에 결국 그렇게 못하고 말았다. 아무리 아르헨티나는 안전하다지만 그래도 밤에 없는 사람들 앞에선 돈 갖고 있는 티를 안 낸다는 게 내 안전 수칙이기 때문에…
이래저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마지막 시간들은 심란했다. 거기 그 레티로의 사람들은 가족이 없거나, 그런 가족들과의 시간 보다는 돈 한푼 이 더 급한 사람들이었을 게다. 아르헨티나의 가족주의는 감동적인 면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대가족주의의 틀에 끼지 못한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는 거 같기도 했다.
호텔에 돌아와서도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간에는 택시가 안 다닌단다. 내가 어제 분명 언제든 택시는 부를 수 있다고 당신들이 그랬다고 하니 ‘ 언제든’ 다니는 건 맞는 데 ‘지금’은 아니란다. 아르헨티나 특유의 불분명한 어법이다. 그래서 결국 만원 웃돈 주고 개인차를 타고 왔는데 그것도 내가 한숨을 푹푹 쉬며 남은 페소화 지폐를 세고 있으니 조금 미안해진 호텔 직원이 슬그머니 다시 전화를 걸어 ‘ 조금 낮춰 낮춰, 손님이 돈이 없대’ 이래서 5 천원 깎아서 된 거였다.
남들 다 일 안 하는 오늘이 바로 대목인 셈인 그 자가 영업자의 차를 타고 오벨리스크를 지나 공항으로 향하는데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새해 맞이를 하며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나는 저기에 끼지 못했을까? 하지만 이제 막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해 그 아름다움에 도취된 즐거운 관광객들과 그동안 이미 볼 거 못 볼 거 다 보고 정은 정대로 들어서 눈물이 나려 하는 나 사이에는 정서적인 간극이 너무 컸다.
버스 타러 또 기차 타러 열 댓번도 더 지나다녔던 레티로, 부에노스 아이레스 서민들의 상징인 그곳에서, 이 시간까지 악착같이 일을 하며 살아가기 위한 한 푼의 돈을 열심히 벌던 그 생명력 넘치던 사람들과 2007년의 첫 시간을 함께 했던 것이, 나로서는 잘한 일이었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차우, 아르헨티나, 보온병을 옆구리에 끼고 다시며 마테 차를 마시던 사람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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