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페미니스트,또는 박제된 천재 / 장혜영
나는 모든 여자 중에 가장 형편없는 여자,Yo, la peor de todas,1990 : 17세기 멕시코의 여류문인 후아나 수녀에 관한 슬픈 일대기
이 세상에 여성으로써 혼자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일일까, 그것도 종교재판과 화형이 횡횡하던 과거의 어느 야만적인 시대에 돈 없고 빽 없으나 오직 뛰어난 지성과 똑똑함과 열정만을 가졌던 여성이 홀로 스스로 서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법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카밀라>로 잘 알려진 아르헨티나 여성 감독 마리아 루이사 델베르그의 대표작 <나는 모든 여자 중에 가장 형편 없는 여자>는 17 세기 누에바 에스빠냐 ( 지금의 멕시코 지역) 최고의 지성이자 열번째 뮤즈로 불릴 정도로 빼어난 문인이었던 후아나 이네스 수녀의 비극적인 삶을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사생아로 태어나 외가에서 자란 후아나(Asumpta Serna 분)는 타고난 머리와 지식에 대한 끝없는 갈구와 노력으로 10대 때 이미 백과사전 적인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을 만큼 천재였지만 당시 대학에는 여성이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오직 독학으로 공부를 계속해야 했다.
순종적인 아내로써 여성의 역할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후아나는 또한 사생아 라는 핸디캡과 좋은 집안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막대한 지참금을 가지고 있어야 좋은 신랑감을 만날 수 있는 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으므로 결혼을 거부하고 고해 신부의 미란다 신부의 충고대로 성 헤로니모 수녀회에 수녀로 들어가게 된다.
때마침 새로운 부왕 부부가 멕시코로 부임해 오고 후아나의 놀라운 지성과 글 솜씨에 탄복한 부왕 부부는 그녀의 든든한 보호막이 되는데 특히 후아나와 마찬가지로 지식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었음에도 그 꿈을 펼쳐보지 못했던 마리아 루이사 부왕비 (도미니크 산다 분)는 후아나의 보호자이자,친구이자,연인과 같은 존재가 되어 두 사람은 우정 이상의 감정으로 가까워지게 된다.
그러나 부왕부부는 스페인 본국으로부터의 송환 명령을 받고 돌아가게 되고, 보호막이 사라진 후아나는 여성 혐오주의자였던 멕시코 대주교와 그의 라이벌이었던 산타 크루스 주교 사이의 음모에 휘말려 이단 재판을 받을 처지에 놓이게 된다.
멕시코 종교 재판소는 후아나의 글 < 편지 > 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후아나의 고해신 부인 미란다 신부는 후아나의 지식과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이 탐욕스런 반종교적인 감정일 뿐이라며 그녀의 전 재산이었던 4000 권의 장서를 모두 팔고 펜을 꺾은 채 단지 한 명의 수녀로 돌아갈 것을 권한다.
페스트가 창궐하여 동료 수녀들이 하나둘씩 숨지던 상황에서 후아나는 자신의 모든 주장과 지식을 포기하는 글을 쓴 뒤 혈서로 ' 나, 모든 여자 중에 가장 형편없는 여자 Yo, la peor de todas ' 라고 싸인을 한다.그로부터 얼마 뒤, 그녀는 페스트에 감염되어 44 살의 나이에 숨을 거둔다.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페미니스트의 비극적인 생애가 주는 의미
이 영화가 주는 뒷맛은 참으로 씁쓸하다. 영화가 단지 그 시대의 광기, 여성에 차별적이었던 그 시대의 문제만을 다뤘더라면 단지 ' 저런 시대에 안 태어나서 다행이다 ' 하는 느낌 정도로 끝이 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현재의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보편적인 문제와 후아나의 내면의 비극을 너무도 잘 짚어내고 있기 때문에 그 여운은 길고도 암울하다.
후아나는 보편적이고 관습적인 삶 대신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길 원했던 의지적인 여성이다. 그런 그녀에겐 스승도 없었고 그녀를 뒷받침해줄 가족도 없었고 그녀를 이해해 주는 연인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수녀원에 들어갔던 것은 그 시대의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이란 규방과 수도원 두 군데 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수녀원을 들어가면 가족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여성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한마디로 너무도 고독했다.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도 진심으로 사랑해 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내면을 이해해 주고 아낌없이 뒷받침 해주는 부왕비에게 우정 이상의 깊은 감정을 품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마리아 루이사 부왕비는 그녀에게 있어 어머니였고, 친구였고, 또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양부모와 같았던 부왕부부 마저 떠나가자, 후아나는 다시 혼자 세상과 싸워야 하는 지점에 서게 된다. 그녀가 "Adios Siguenza, Mi Amigo 안녕 시겐사, 나의 친구여"라며 이별을 고하던 학자 시겐사와의 이별 장면은 그런 점에서 무척이나 눈물겹다. 그 순간 그녀는 정말로 마지막 친구마저 떠나 보낸 것이다.
페스트가 창궐하고 동료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그동안 그녀를 외면해왔던 미란다 신부는 그녀에게 고해성사를 하라고 권한다. 그는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살피는 후아나를 보며 ' 이것이 바로 내가 바랬던 후아나의 모습 ' 이라고 말한다. 빼어난 지성을 가졌으면서도 그것을 단호히 포기하고 한 포기 잡초처럼 조용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 신이 원하는 후아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 순간, 후아나 역시 무너진다. 그녀의 인생이 비극라는 것은, 그녀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종교 재판소에 굴복하고 "나는 모든 여자 중에 가장 형편 없는 여자"라고 서명했다는 점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그녀 자신이 그 혼돈의 끝에 스스로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버렸을 지 모른다는 점이다.
결국 권위는 승리하고 남다른 삶을 꿈꾸었던 한 천재의 의지는 무너지고 그녀의 꿈은 갈갈이 찢기고 만다. 이 세상에서 남들과는 다른 삶을 꿈꾼다는 것은 이토록 많은 방해를 받는 일이었고, 여성으로써 스스로 홀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또 이토록 천대받고 끊임없이 설득당해야 마땅한 일이었던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의 < 신앙의 덫 > 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일종의 실내극 형식으로 수녀원과 궁정이라는 공간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음악도 많이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후아나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는 어린 시절의 후아나가 현재의 후아나 에게 말을 거는 등 연극적인 요소도 많이 삽입되고 있다.
후아나 역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아숨타 세르나는 알모도바르 감독의 <마타도르> 와 <와일드 오키드> 같은 미국영화에도 출연했던 스페인 여배우이고, 부왕비 역을 맡은 도미니크 산다는 비토리오 데 시카의 <핏치 콘티니스의 정원,70>에서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프랑스 출신 여배우로 이제 중년을 넘긴 나이임에도 여전히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나 스페인어는 서툰지라 목소리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주인공으로 낯이 익은 세실리아 로스가 더빙을 하였다.
알모도바르 영화의 관능적인 여주인공이었던 아숨타 세르나는 후아나 역으로 새로운 변신에 성공하였고 <핏치 콘티니스의 정원> 의 아름다운 금발 소녀 도미니크 산다는 이젠 우아한 중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인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 영화
책을 비롯한 그녀의 모든 것, 특히 부왕비가 그녀에게 준 깃털 팬 마저 빼앗긴 채 멍하니 앉아 있는 후아나 수녀의 모습 위로 "그녀는 얼마후 페스트에 감염되어 사망했다"라며 올라오던 자막이 너무도 슬프게 느껴졌던 영화 "Yo,la peor de Todas"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것이면 차라리 제 목소리 한번이라도 내질러 보고 죽을 것이지, 병으로 죽어가며 그녀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일생이 헛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사생아에 여자라는 이유로 그렇게 짓밟혀야 했던 한 라틴 아메리카 여성의 이야기를 보며 인생이 허무하단 생각이 자꾸 밀려왔지만 그래도 이렇게 좋은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이 좋은 영화를 대여해 준 바오로 딸 서원과 다소 음질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일반 상업 비디오 회사에서는 출시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작품을 출시해준 성 베네딕토 시청각 연구회에 감사를 전한다.
: 2002 년 봄에 씀. http://latincine.netian.com 에 처음으로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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