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고릴라 마르셀리노
요즘 한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우연히 인터넷으로
마르셀리노는 원래 이름이 리카르도 마르셀리노라 자기는 리카르도라 불러주길 원하는 거 같은데 리카르도는 너무 흔한 이름이라 어느 리카르도가 어느 리카르돈지 구분이 안되니 다들 마르셀리노라 부른다. 비교적 젊은 사람이고 얼굴도 그럭저럭 잘 생기고 덩치도 좋은데 팔이 길고 손이 커서 조금 고릴라 스타일로 생겼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작년에 역사 철학 수업을 했는데 나름대로 열의를 가지고 수업을 진행했다. 나는 역사 철학이고 뭐고 잘 몰라서 왜 자꾸 성서 얘기밖에 안하냐 이게 무슨 역사 철학이야 기독교 철학이지 하며 지루하게 듣다가 칸트와 니체에 와서 눈이 반짝했었다. 칸트의 경우는 내가 그의 역사 철학 한글 책을 갖고 있어서 읽어 봤더니 상당히 현실적이고 명석한 면이 있어 의외로 재미있게 봤고 니체야 암만 그래도 젊어 한 때 니체에 안 빠진 사람 없으니 쉽게 이해가 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말 에세이는 바그너의 악극 속에 나타난 니체의 역사 사상 에 대해 썼다. 바그너는 한때 니체의 우상이었는데 한 순간 틀어져 버려 니체가 엄청 바그너를 비판했는데 그 니체의 바그너 비판에 대해 내가 반론을 하는 형식 , 즉 바그너를 옹호하는 식으로 썼었는데 어쨌든 마르셀리노가 잘 썼다고 (?!) 해주었다.
근데 이 사람이 올해 프랑크 푸르트 학파 수업을 진행했는데 작년과는 달리 갑자기 수업에 열의가 식은 모습이었다. 이유인즉슨 학생들이랑 좀 싸운 거 같았다. 덩치도 커서 조기 야구회도 나가는 사람이 ( 멕시코는 보면 주로 뚱보나 거인들만 야구를 한다) 생각보다 자주 아파서 한번 수업을 취소했는데 그 다음주 수업 때 이전 주 때 발표하기로 했던 학생들 몇명이 오늘 저녁 수업 때 못 간다고 발표 요약문만 주고 간 모양인데 그때 시시비비를 좀 했었던 모양이다. 마르셀리노는 학생이 왜 수업을 자꾸 빠지냐고 하고 학생들은 교수가 지난 주 수업 취소해서 이리 된 거 아니냐 하면서...
그래서 그 수업은 나랑 아리오스토 두명 학생 밖에 안와서 학교 식당에 가서 셋이서 오붓하게 했고, 그 뒤로 마르셀리노는 완전히 수업 준비도 안하고 들고온 텍스트만 줄줄 읽다가 끝내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근데 어쨌든, 문제는, 나는 이 수업도 기말 에세이로 채점을 할 줄 알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했는데 학생들이 하도 공부를 안한다 싶었는지 기말 에세이가 아닌 중간 고사를 치겠다는 것이다.
방법인 즉슨 자기가 먼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대한 질문을 알려주면 학생들이 거기에 대한 답을 아주 길게, 작은 논문처럼 써서 나중에 내는 방법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나는 완전히 비상이 걸렸다. 그래서 인터넷을 열나게 뒤져서 일단 한글로 된 프랑크푸르트 학파 자료들을 찾아봤더니… 이게 이미 내가 어렴풋이 옛날에 줏어 듣고 줏어 읽고 토론도 하고 했던 것들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중 비교적 글을 쉽게 쓰고 대중적이었던 에리히 프롬. [소유나 삶이냐' 로 유명하지만 제목과 내용이 전혀 다른 '사랑의 기술' 이라는 책이 5 공화국 시절 청소년 필독서로 �혔던 해프닝도 있었다. '사랑의 기술'은 맑시즘을 차용한 비판 철학서이고 프롬은 프랑크프루트 학파 중 후세대에 속한다. (사진출처: http://www.donews.net/drugstore/archive/2005/07/30/488242.aspx )
그래서 철학은 사회, 특히 산업 사회 그리고 산업으로서의 문화를 비판하는 것이 주 기능이라며 비판만을 하는 것이 철학의 중립성이라는 이른바 비판 철학이 가장 주된 그들의 모토였다. 그러니, 지금의 한국의 문화 평론가들, 나의 세대와 거의 비슷한 그들의 그 특유의 비판적 어조가 다 이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나온 것이다.
한때 마르쿠제나 아도르노를 인용하는 게 이 세대의 유행이었으니 이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한국 좌파, 특히 네오 맑시스트 그룹에 끼친 영향은 상당했고 그 영향을 받은 이들이 지금도 아도르노 풍의 비판적이고 냉소적이니 평론들을 쓰고 있다.
하여튼 이렇게 되니, 그동안 재미없게 이 수업을 듣고 있었던 나는 할 말이 너무너무 많아져 버렸다. 비판을 위한 비판, 나의 세대의 쟁점들 중에 난 이것만큼은 정말로 반대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업 때도 계속 나와 마르셀리노 와의 대화가 이렇게 되어 버렸다.
마르셀리노: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철학의 기능은 비판이고 어쩌고 저쩌고.. 현대 사회의 문제는 이거고 저거고..
나 : 그런데 그 대안은 뭔데요? 현대 사회가 그렇게 문제인 건 맞는 데 그럼 어떻게 바꿔야 되죠? 그냥 대안없는 비판인가요?.
그런데 난 말을 잘 못하니까, 그 문제의 중간 고사에다 점수는 어찌 나오던지 말던지 내가 예전부터 생각했던 이 네오 맑시스트들의 문제점을 막 써내려갔다. 내가 제일 비판하고 싶은 부분은 이들이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양비론을 펼쳐서 사람들을 냉소주의에 빠지게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문화나 예술이 정치적 도구로 쓰여져선 안된다고 했는데 물론 그들의 주장은 문화나 예술이 제품 광고 같은 자본주의의 선전 도구로 쓰여지면 안된다는 뜻이 강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90 년 중반까지 똑 같은 논리로 창작의 자유가 막힌 적이 있었다. 문학은 정치적 선전의 도구가 아니라고, 그래서 파업에 관련된 소설이나 정치 사건을 다룬 글 이런 거 다 출판 못하게 막고 산이나 새나 사랑에 관한 글만 쓰라고 하고 그랬던 거 그거 어떻게 보면 프랑크푸르트 학파 주장과 똑같았다.
이들은 맑시즘을 이론적으로 인용을 하기는 했지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쪽을 다 비판했다. 그리고 대안 제시는 약간 뒤늦은 세대인 마르쿠제와 프롬 빼고는 거의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글 자체도 동양 철학에 영향을 받은 프롬을 제외하면 엄청 어렵고 난해하고 현학적으로 썼다. 무식한 사람은 읽지 마란 얘기다.
그리고 그들은 부유한 유태인들이었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도 이른바 50 년대 메카시 선풍 (찰리 채플린까지 공산주의자라고 쫓아내 버렸던) 의 빨갱이 사냥에서도 전혀 피해가 없이 살아 남았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들은 염세주의자들이었고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도 갖고 이었던 거 같다.
왜냐면 그들의 멤버 중 하나였던 벤자민은 2 차 대전 때 독일 국경을 넘지 못해 아우슈비츠로 끌려갈 위기에 닥치자 권총으로 자살해 버렸고, 똑똑하고, 돈 많아서 살아 남아 미국에서 지성으로 떠오른 그들의 마음 한 켠에 죽은 자들, 2 차 대전 때 희생자들에 대한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의식이 남아 있었음은 분명할 터.
어쨌든 그렇게 나 혼자 열내면서 그 위대한 프랑크프루트 학파의 거성들을 비판했는데도 마르셀리노는 좋은 점수를 주었다. 그리고 기말 리포트를 내라고 했는데 마르셀리노는 그냥 이번 수업에 대한 총평 정도 써 내란 얘기였는데 내가 약간 잘못 이해한데다 할 말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 나는 “ 저기, 아도르노의 문화관에 대한 비판을 써도 될까요?” 라고 했다. 그랬더니 마르셀리노가 눈이 동그랗게 되면서 하는 말이 “ 뭐? 살바시온 (구원)? 좋지 좋아.” 이러는 것이다.
그래서 난 아도르노도 무슨 구원관 같은 게 있었나 이게 무슨 소리지.. 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지난 학기 때 내가 썼던 그 장대한 바그너와 니체 에세이 말하는 거였다. 바그너의 작품들이 다 살바시온 (구원) 에 관한 건데 나는 그게 기독교적 구원관이 아니다는 식으로 썼는데 그게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반년 지나서도 마르셀리노가 그 얘기를 또 꺼낸다. 하기야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난데없는 바그너라니.. 니벨룽겐의 반지 스토리 다 나오고…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기말 에세이도 역시 바그너에 관해 쓰고 말았다. 사회 비평가이자 음악 비평가였던 아도르노는 바그너, 브레히트, 입센 등등을 싫어했다. 예술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쇤베르크, 스트린드베리 같은 전위 예술가들이야 말로 진정한 저항의 예술가들이라고 하는데 내가 볼 땐 일반인들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예술가 들이다. 한마디로, 아도르노의 지적 수준이 너무 높아 일반 대중의 시각을 고려하지 않는 거 같았다.
게다가 바그너에 대한 그의 악감정은 유태인으로서 독일 민족주의자에 대한 개인적인 울분이 내포되어 있다 보였는데 그래서 거기에 대해 또 열나게 쓰고 나니 한 두어장만 쓰라던 기말 리포트가 영 길어졌다. 게다가 어찌 보면 나도 똑같다, 내가 그렇게 바그너를 옹호하고 드는 것은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했던 내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된 게 사실이니..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다. 우리나라 문화 평론가들은 이제 아도르노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벗어나야 된다. 프랑크 프루트 학파의 비판 이론은 자본주의의 단계를 제대로 거친 서구 사회를 위한 것이지 우리를 위한 게 아니니 이젠 좀 그런 현학적인 표현, 비판적인 냉소를 벗어나 대중을 이해하고 우리의 상황을 인정하는 좀 따뜻한 글들을 썼으면 좋겠다는 게 내가 한국의 문화 평론가들에게 바라는 한가지 바램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다시 프랑크프루트 학파의 존재를 일깨워주고 이 생각 저 생각 하게 해준 사람 좋은 마르셀리노에게 감사를 전한다. 후하게 준 점수도 고맙고..